20년 전엔 패션이 무서웠다

2006년, 한 영화는 패션 잡지 보조의 자리에서 본 세상의 잔인함을 그렸다. 미란다 프리슬리라는 이름이 곧 권력의 동의어가 됐다. 그 영화가 무서웠던 이유는 단순했다 — 거기 다니는 사람들의 삶이 너무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화려한 옷, 화려한 파티, 화려한 무관심. 그 세계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과, 그 세계가 사람을 갈아버린다는 공포가 동시에 작동했다.

20년이 지나 같은 인물들이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에 영화가 진짜로 두려워하는 건 패션이 아니다. 더 두려운 건, 진지한 저널리즘에 관심을 가진 안정적인 편집 일자리가 지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Roger Ebert. 한 평론가는 정확히 짚었다 — 테크 마인드와 결합해 콘텐츠 농장으로 변하다 영영 사라지는 매체보다는, 사라지지 않는 잡지 하나가 차라리 더 비현실적인 판타지가 됐다 Roger Ebert고.

무너지는 것을 다루는 영화가 무너지지 않으려는 방식

흥미로운 건 이 영화 자체가 그 위기를 정확히 증언하면서도, 그 해법은 가장 옛날식으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지점은, 잡지 출판업의 붕괴와 레거시 인쇄 매체의 죽음, 그리고 그 위에서 경력을 쌓았던 창작자와 저널리스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시기적절하게 그려낸다는 점이다 Blex Media. 미란다는 더 이상 무적이 아니다. 가장 울림 있는 감정의 순간은 미란다가 자신의 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진짜 슬픔을 마주하는 장면이다 —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이 만들어온 아름다움과 예술성 자체가 가치를 잃어가는 걸 지켜보는 장면이다 NPR.

그런데 영화가 이 위기를 푸는 방식은 위기의 본질과 정확히 어긋난다. 결국 한 억만장자가 등장해 저널리즘의 미래를 구원한다 — 적어도 한동안은 Roger Ebert. 매체의 죽음을 그토록 정확히 진단한 영화가, 그 죽음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다시 한 사람의 돈을 불러온다. 진단은 2020년대인데 처방은 1980년대다.

Lady Gaga가 부르는 노래

이 모순은 사운드트랙에도 스며 있다. 레이디 가가가 직접 작곡에 참여한 곡들이 사운드트랙에 실렸고, 그중 한 곡의 제목은 ‘Material Lover’다 Wikipedia. 물질을 사랑하는 사람. 영화가 던지는 질문 — 우리는 매체의 죽음을 슬퍼하는가, 아니면 그 매체가 주던 화려함의 죽음을 슬퍼하는가 — 가 이 노래 제목 하나에 압축돼 있다. Material Lover를 들으며 패션 화보를 떠올리는 사람과, 사라져가는 저널리즘을 떠올리는 사람은 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다른 슬픔을 느낀다.

구원자가 필요한 이야기의 함정

미란다 프리슬리는 원래 구원이 필요 없는 인물이었다. 그녀 자신이 권력이었고, 누구도 그녀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그런데 산업 자체가 무너지자, 한 개인의 카리스마로는 버틸 수 없는 구조적 붕괴 앞에서, 영화는 결국 외부의 자본을 불러야 했다. 이건 미란다의 패배가 아니라 산업 전체의 패배를 보여주는 장면인데, 영화는 그걸 해피엔딩으로 포장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지금 무너지는 것들을 구할 때, 정말 그것을 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구하는 행위 자체를 콘텐츠로 소비하고 있는가. 억만장자가 매체를 구하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다만 그 감동이, 매체가 다시 독립적으로 설 수 있다는 희망에서 오는 건지, 누군가 자선을 베푸는 모습을 보는 데서 오는 안도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우리가 정말 그리워하는 것

뒤샹의 변기가 가치를 만든 건 서명 때문이었다. 지금 이 영화가 그리워하는 건 정확히 그 반대다 — 서명 없이도 가치가 보장되던 시절, 매체 자체가 권위였고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던 시절. 지금은 모든 매체가 누군가의 서명, 누군가의 투자, 누군가의 알고리즘 허락을 받아야 살아남는다.

20년 전 우리는 미란다가 무서웠다. 지금 우리는 미란다가 무사하기를 바란다. 같은 인물에게 느끼는 감정이 공포에서 안타까움으로 바뀐 그 거리만큼, 우리가 잃어버린 게 있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이게 사라지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나. 그리고 그걸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당신이 바라는 방식으로 구하고 있는가.


이번엔 영화 비평 + 사운드트랙(음악)을 엮어서 “매체의 죽음과 구원”이라는 주제로 갔어요. 이 흐름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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